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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랍스터> 리뷰: 사랑이라는 공산품

영화 비평리뷰

by 신비의 속삭임 2019. 5. 17.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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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랍스터>의 줄거리가 일부 포함되어있습니다.

*해당 글은 작성자의 개인적인 견해를 담은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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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바람 부는 다리가 아니라 포근한 침대가 필요한 거야. 여기에 사랑은 없어."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속 갑작스레 찾아온 첫사랑에 방황하는 알렉스에게 한 남자가 하는 대사이다. 공사 중인 낡은 다리에서 노숙을 하다가 찾아온 알렉스의 사랑은 비참하면서도, 그만큼 절실하게 느껴진다.

대부분의 로맨스 영화들은 이처럼 '사랑'을 일상에 찾아오는 축복이자,  그 무엇과도 쉽게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묘사한다. 남녀주인공들은 우연한 계기를 통해 사랑을 속삭이며, 갖은 시련과 주변의 고충을 견디며 사랑을 더 굳건히 지켜나가곤 한다. 하지만, 영화 <더 랍스터>는 여기서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만일, 모든 이가 같은 사랑을 하고 있다면?

 

 

 

   커플과 솔로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까지 커플과 솔로, 양 극단의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다. 커플의 삶을 선택할 시, 상대방과 어느 정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평생을 자신이 선택한 반려자와 함께 해야 한다. 주인공이 머무는 의문스러운 호텔은 그런 환경에 놓인 커플들이 그 규칙을 지킬 수 있도록 아이 입양을 유도하기도 한다. 이와는 정 반대로, 솔로의 삶을 선택할 시에는 철저히 외톨이로 살아야 한다. 항상 커플들에게 쫓겨야 하며, 타인과 동료애 이외의 감정은 허용되지 않는다. 심지어, 춤도 혼자 춰야 한다.

영화는 이렇게 단편적인 모습만을 제시함으로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사랑'의 정의를 깨버린다. 커플이 되지 않으면 동물로 변해야 하는 이 기묘한 사회에서, 주인공은 거짓으로 사랑을 흉내내기도 한다. '사랑'을 표방하는 세계지만, 이 사랑에 '낭만'과 '진심'은 없다. 

 

 주인공은 이러한 사회에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택하여 가려는 모습을 보인다. 변하고 싶은 동물이 시야가 어두운 랍스터라고 답하기도 하고, 커플 세계에서는 외톨이를, 솔로 세계에서는 커플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인다. 모 아니면 도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주인공은 어떤 소속감도 느끼지 못하고 방황한다. 하지만, 이는 비단 주인공 데이빗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영화 속 많은 이들도 소속감을 느끼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일 뿐이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아는 낭만적인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말은, 사실 외톨이 부대의 대장이 "혼자 살 수 있냐"면서 총을 겨눈다면, 사랑하는 대상이 자기 자신으로 바뀔만큼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이코패스 애인을 동물로 변하는 방에 가두는 데이빗. 그는 커플이 되기 위해, 그리고 동물로 변하지 않기 위해 거짓으로 그녀를 사랑하려 한다. 이 호텔 속에서, 커플인 그에게도 '사랑'은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몸에 묶인 밧줄이다. 

 

 

'사랑'은 단지 규칙을 통체하는 단어이고, 무언가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며, 사람들의 자유를 옥죄는 수갑에 불과하다. 비록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연인들의 행동에는 제약이 따른다. 데이빗과 그의 근시여인이 함께 이어폰을 나눠낄 생각을 못했던 것처럼. 결국 숲에서 도망쳐 레스토랑으로 온 데이빗이 '랍스터'가 될 운명을 피하지 못한 것처럼.

 

 

그들은 함께 추는 춤이 금지된 외톨이 부대에서 눈이 맞아 커플을 꿈꾼다. 그들이 함께 음악에 맞추어 움직이려면, 이어폰을 나눠꽂아야 한다는 사실을 '커플'로 득실한 호텔에서 벗어나 알게된다는 아이러니.

   

 

 

   우리의 규격화된 사랑

 

 이는 오늘 날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단지 동물로 변한다는 극적인 설정만 면했을 뿐, 우리는 '형체가 없는 사랑'에 대한 욕망만을 주입당하고 있다. 그런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조건과 절차가 필요하다.

 어떤 이들이 커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그들이 언제부터 사귀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추가로, 이들이 서로의 이상형에 가까운가를 묻는 것또한 큰 도움이 된다. 둘째는 각종 기념일들을 챙기고, SNS에 이와 관련된 사진들을 올리는가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로 성적인 접촉을 하는가를 묻고, 이에 긍정적인 대답을 한다면 더 이상 확인할 필요없이 이들은 완벽한 '사랑'을 하는 커플이다.

 

 나이에 따라 데이트 코스나 기념선물도 어느정도 정해져 있다. 10~20대는 저렴한 커플링을 끼며, 가볍게 즐길수 있는 방탈출 카페, 오락실, 양식 및 분식집을 주로 즐긴다. 30~40대의 경우에는 드라이브를 즐기며, 값이 제법 있는 반지를 끼고, 영화관, 호텔, 고급 레스토랑을 주로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한다. 이런 보이지 않는 기준을 벗어나면, 제 아무리 마법의 효력을 가진 '사랑'이라고 한들 쉽게 비난받는다. 40대가 10대의 데이트코스를 즐긴다거나 하는 현상이 주변에서 벌어진다면, 이를 옹호할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웹드라마, 영화, 예능, 웹툰과 같은 다양한 미디어들은 크고 작은 방식으로 이런 '사랑'을 홍보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극한의 상황과 설정은 단지 영화에서의 허구일 뿐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미 국가는 공장이고, 사랑은 기계가 찍어내는 공산품임을 알고 있다. 포털사이트에 올라오는 결혼회사의 광고는 때때로 자극적인 문구를 사용하여 홍보를 한다. '솔직히 학벌, 외모, 능력 다 따지고 싶잖아요.', '너보다 예쁜 애한테 장가간다!'와 같은 말들은 병적으로 공통점을 찾아 연애를 하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런 결혼회사들은 국가에 공헌하여 표창장을 받았다는 점을 광고에 내세우기도 한다.

 

 

 

 

   우리의 사랑은 '공산품'이다

 

 

 

 사회는 모방과 거짓이 난무하는 연애를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는 이를 장려하거나 방치한다. 현대사회에서 많은 이들은 이미 호텔 속 투숙객들처럼 어슬렁거리고 있다. "30이 넘기전에 적당한 짝을 찾아서 결혼해야지." 혹은 "그래도 내 남자친구는 저 연예인 정도로 생겨야 이상형이지."같은 사랑에 대한 수많은 잣대들은 진정 이들이 '사랑'을 원하는지, 아니면 사랑이라는 허구의 이미지를 '소유' 하기를 원하는지 구별하기 어렵게 만든다. 

 

 

 

주인공 데이빗이 적당한 짝을 물색하기 위해 식당으로 들어서는 모습이다.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 호텔에는 수많은 '데이빗들'이 존재한다.

 

 

 외톨이 무리의 대장은 여전히 우리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다. 당신들이 느끼는 사랑은 주입되었고,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공허한 감정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사랑'을 전시하는 대중매체는 결국 늘 동일한 결론을 내린다. 사랑은 위대하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힘을 가지고 있고, 타인을 사랑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지만, 사랑의 실체는 평범하다. 게다가, 우리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랑 또한 '공산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일깨워주고 싶었던 것은 이 간단한 정의가 아닐까.

 

 

 

그들이 안고 있는 '사랑'은 공허하게 주입된 껍데기인가, 아니면 '우리가 현재 정의하고 있는 낭만적인 사랑'인가? 이 포스터는 영화의 결말을 끝까지 쉽게 예측하지 못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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